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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침착함과 인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 삼종기도 훈화를 통해 선한 일에 몰두했으나 반대에 부딪히고 이해 받지 못할 경우 우리 내면에 생기는 부정적인 태도에 대해 설명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침착, 인내, 오래 견딤으로써 확고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성 베드로 광장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번역 이창욱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일 전례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들려줍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렇게 거룩한 도시를 향한 “위대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마지막 여행이기에 특별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아직도 지나치게 세속적인 열의에 가득 찬 제자들은 스승의 승리를 꿈꿉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배척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루카 9,22.43ㄴ-45 참조). 그분께서는 큰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단호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도 반드시 이와 동일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결단은 무엇으로 이뤄져 있나요? 우리는 진정한 결단력을 가지고 진심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인 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결단력 있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곧이어 들려주는 사화는 이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일행이 여행을 하던 도중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원수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화가 난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뿐 아니라 두 형제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수심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십니다(루카 9,52-55 참조).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지고 오신 “불”은 전혀 다른 불(루카 12,49 참조),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하려면 인내심, 항구함, 참회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심지어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그러고 있는데도 환대를 받기는커녕 반대에 부딪힐 때 그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개입시키면서 천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길을 가십니다. 분노의 길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려는 단호한 결단의 길입니다. 이는 완고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으면서 침착하고, 인내하고, 오래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약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와 반대로 큰 내면의 힘을 나타냅니다. 반대에 직면했을 때 분노에 사로잡히는 일은 쉽고 본능적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대로 “다른 마을로 가신”(56절 참조) 예수님처럼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대에 부딪혔을 때, 비난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선행을 하기 위해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룩한 선에 만족하고,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인 인정을 추구하지 않으며, 평온한 사람이 되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어떤 지점에 있나요? 반대와 오해 앞에서 우리는 주님께 몸을 돌리고 그분께 의지하는가? 우리는 그분께 변함없이 선행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가? 아니면 박수갈채를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하고, 행여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억울해 하거나 원망하고 마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박수갈채를 받으려 하고, 다른 이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박수를 받으려고 그런 일을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건 안 됩니다. 우리는 섬김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박수갈채를 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열정이 선의에서 나온 정의감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 그것은 연약함, 예민함, 조급함과 뒤섞여 있는 교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당신처럼 될 수 있는 힘, 곧 단호한 결단으로 이 섬김의 길을 결연히 따라갈 수 있는 힘을 청하도록 합시다. 어려움이 닥칠 때, 선을 위해 우리 자신을 소모하는데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심지어 우리에게 자격지심을 안겨줄 때, 복수심에 불타지 말고, 옹졸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결단을 우리도 내릴 수 있도록 동정 마리아께서 도와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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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6월 2022, 22:15

삼종기도(三鐘祈禱, 라틴어 Angelus 안젤루스)는 예수님 강생(降生) 신비를 기억하면서 하루에 세 번 바치는 기도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에 종을 세 번씩 치면서 기도한다. 안젤루스(Angelus)라는 명칭은 라틴어로 시작하는 삼종기도 “Angelus Domini nuntiavit Mariae(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의 첫 단어인 안젤루스(Angelus)에서 유래됐다. 삼종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 초점을 둔 세 개의 간단한 계응시구와 세 번의 성모송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일과 대축일 정오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과 교황이 함께 바친다. 삼종기도를 바치기 전에 교황은 그날 독서에서 영감을 얻은 짤막한 연설을 한다. 기도를 바친 다음에 교황은 순례객들에게 인사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는 안젤루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인 레지나 첼리(라틴어 Regina Coeli ‘하늘의 모후님’), 곧 부활 삼종기도를 바친다. 삼종기도는 세 번의 영광송을 바치면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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