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4세, “평화의 일꾼이 되기 위해 우리를 일치시키는 유대들을 돌봅시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폭스바겐 아레나에서 거행된 미사 강론에서 레오 14세 교황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선한 삶에 진심으로 헌신”하고, 세 가지 “다리”를 소중히 돌볼 것을 당부하셨다. 이는 첫째, 라틴, 아르메니아, 칼데아, 시리아 전통을 가진 공동체 간의 다리, 둘째,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회 일치적 관계의 다리, 셋째, “다른 종교의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의 다리이다. 교황은 또한 세상에서 종교가 전쟁과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너무 자주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제1차 니케아 보편 공의회 1,700주년 기념
레오 14세 교황의 이즈니크(튀르키예) 순례 및
튀르키예와 레바논 사목 방문
(2025년 11월 27일 - 12월 2일)

폭스바겐 아레나에서 거행된 미사 중
교황 성하의 강론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이스탄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이신 성 안드레아를 기념하는 축일의 전야에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며, 동시에 대림 시기를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 1700년 전 니케아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이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신비를 엄숙히 선포했던 그 믿음을 되새기며, 성탄에 오실 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례는 첫째 독서(이사 2, 1-5 참조)를 통해 이사야 예언서의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본문에는 모든 민족이 빛과 평화의 장소인 주님의 산으로 올라오라는 초대가 울려 퍼집니다(3절 참조). 저는 이 말씀에 담긴 몇 가지 이미지를 중심으로, 우리가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의미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진 산”(이사 2, 2 참조)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이루시는 일의 열매가 오직 우리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선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 위에 자리한 시온의 아름다움, 곧 충실함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공동체는 모든 이에게 빛의 표징이 되는 일치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선의 기쁨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를 많은 성인들의 삶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아의 열정 덕분에 예수님을 만났고(요한 1, 40-42 참조), 안드레아와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열정에 이끌려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수 세기 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 암브로시오의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처럼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우리 역시 믿음 안에서 우리 증언의 힘을 새롭게 하라는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교회의 위대한 목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성덕의 매력을 수많은 기적보다 더 웅변적인 표징이라 말하며, “기적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남아 끊임없이 덕을 쌓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마태오 복음 주해, 43, 5).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살핍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복음이 권고하듯(마태 24, 42 참조) 우리 자신을 살피며, 기도와 성사로 우리의 믿음을 가꾸고, 사랑 안에서 일관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성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로마 13, 12 참조). 세상 끝나는 날 영광스럽게 오실 주님께서는 매일 우리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 땅의 역사 안에 가득한 수많은 성덕의 모범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듯, 선한 삶의 진실한 노력으로 준비하며 기다립시다(마태 24, 44 참조).

이사야 예언자가 보여주는 두 번째 이미지는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이사 2, 4). 오늘 이 초대가 얼마나 절실하게 들립니까! 우리 주변에, 나아가 우리 안과 우리 사이에도 평화와 일치, 화해가 얼마나 간절히 필요합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번 방문의 로고에 담긴 상징 가운데 하나인 ‘다리’의 이미지를 떠올려 봅니다. 이 이미지는 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을 잇는 유명한 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개의 다리가 더해져 지금 이 두 해안을 잇는 연결 지점은 세 곳이 되었습니다. 세 개의 소통, 교류, 만남의 구조물은 웅장해 보일지라도, 그것들이 연결하는 광대한 영토와 비교하면 작고 연약해 보입니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이 세 다리는 우리 공동의 일치를 위한 세 가지 차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공동체 내부의 일치,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과의 일치, 그리고 다른 종교에 속한 이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세 개의 다리를 돌보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것들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은, “산 위에 세워진 도성”(마태 5, 14-16 참조)으로 부르신 우리의 소명의 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 교회 안에는 라틴, 아르메니아, 칼데아, 시리아라는 네 가지 전례 전통이 존재하며, 각각 영적·역사적·교회적 차원에서 고유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서로를 잇는 보편성이라는 교회의 아름다운 얼굴을 탁월하게 드러냅니다. 제단 주위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견고히 다져지는 일치는 강하고 흔들림 없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일치를 실현하는 일은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치는 보스포루스의 다리들처럼 시간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구조가 약화하지 않도록 세심한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목적지이자 어머니인 하늘 예루살렘(갈라 4, 26 참조)을 상징하는 약속의 산을 향해 눈을 고정하며,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결속을 강화하고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하며, 세상 앞에서 주님의 무한하고 보편적인 사랑을 믿을 수 있게 증언하도록 힘씁시다.

이 전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두 번째 친교의 유대는 그리스도인 일치, 곧 교회 일치적인 유대입니다. 다른 교파 대표자들의 참여 역시 이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구세주에 대한 같은 믿음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교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형제자매와도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우리는 어제 이즈니크에서의 기도 안에서 이를 체험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걸어온 길이며, 성 요한 23세께서 이 땅과 깊은 연대 속에서 열정적으로 증진하신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요한 23세의 기도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희생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뜨겁게 간청하신 그 일치의 위대한 신비가 이루어지기를”(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 1962년 10월 11일, 8.2) 청하며, 오늘도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요한 17, 21)라는 요청에 ut unum sint, 일치에 대한 우리의 “예”로 응답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세 번째 유대는 비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가 종종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인간의 태도와 형제인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 요한 4, 8)라고 말합니다”(「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5항).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잇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편견과 불신의 벽을 허물며,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진하여,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 9)이 되라는 초대를 전하기 위해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가치들을 대림 시기를 위한 결심으로 삼고, 더 나아가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지향으로 삼읍시다. 우리의 여정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놓아 주신,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함께 걸어가고, 언젠가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늘 그 다리의 양쪽 끝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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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1월 2025, 2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