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 레오 14세 교황 “교회의 힘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음의 논리’에 있습니다”

레오 14세 교황이 11월 28일 이스탄불 성령 주교좌성당에서 주교, 사제, 부제, 남녀 축성생활자, 사목 종사자들과의 기도 모임에서 교회 사명의 열매는 구조나 경제적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젊은이와 이주민, 난민을 돌봐야 하며,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닌 지혜로운 선생 정도로 여기는 ‘아리우스 부흥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제1차 니케아 보편 공의회 1,700주년 기념
레오 14세 교황의 이즈니크(튀르키예) 순례 및
튀르키예와 레바논 사목 방문
(2025년 11월 27일 - 12월 2일)

 

주교, 사제, 부제, 남녀 축성생활자, 사목 종사자들과의
기도 모임에서 행한 교황 성하의 연설

성령 주교좌성당(이스탄불)
2025년 11월 28일, 금요일

 

존경하는 주교님들,
사랑하는 사제, 남녀 수도자, 사목 종사자들과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하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입니다. 저의 첫 번째 사목 방문으로 이곳 튀르키예 “거룩한 땅”을 방문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거룩한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초기 그리스도교와 만나게 되었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서로 아우러졌으며, 많은 공의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앙은 기나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칼데아의 우르에서 길을 나섰고, 나중에는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에 해당되는 하란 지역에서 길을 떠났는데, 결국 그는 약속의 땅으로 떠났던 것입니다(창세 12, 1 참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때가 찼을 때 그분의 제자들도 아나톨리아로 향했고, 안티오키아에서는 - 나중에 이냐시오 성인이 주교였던 곳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사도 11, 26 참조). 성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신의 사도적 여행을 시작하였고 많은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일부 고대 자료에 따르면,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인 요한 복음사가가 머물다가 죽은 곳도 아나톨리아 반도의 해변가, 에페소였습니다(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 3권, 3, 4;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권, 24, 3 참조).

우리는 비잔틴의 위대한 과거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선교 활동, 레반트 전역에 걸친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감탄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날에도 튀르키예에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칼데아와 같은 동방 전례뿐 아니라 라틴 전례를 따르는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살고 있습니다. 보편 총대주교직은 그리스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정교회에 속하는 신자들에게도 계속해서 기준점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 유구한 역사의 풍요로움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사도들,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신앙의 씨앗을 일구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을 앞에 있었던 역사는 단순히 기억하고 영광스러운 과거 속에 기록 보관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한편, 우리는 가톨릭교회가 수적으로 더 감소한 것을 체념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빛을 받은 복음적 관점을 취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시기 위해 작음의 길을 택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두 증명하도록 부름을 받은 주님의 방식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선포하며 작은 새싹이 움트는 것을 말합니다(이사 11, 1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어린이들을 칭찬하셨고(마르 10, 13-16 참조), 하느님 나라는 강압적으로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루카 17, 20-21 참조), 땅에 뿌린 어떤 씨앗보다 더 작은 씨앗처럼 자라난다고 단언하셨습니다(마르 4, 31 참조).

이 작음의 논리가 교회의 참된 힘입니다. 실제로 그 힘은 교회의 자원이나 구조에 있지도 않고, 교회 사명의 열매는 수적인 합의나 경제적 권력, 사회적 영향력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의 어린 양의 빛으로 살고, 그분 주변에 모여,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거리를 따라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명에서 교회는 항상 주님의 약속에 자신을 맡기도록 다시금 부름을 받습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 32).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신자, 사제, 주교가 이러한 작음의 길을 걷지 않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 하느님 나라는 작음에서, 항상 작은 것에서 싹틉니다”(산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2019년 12월 3일).

튀르키예에 있는 교회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누룩으로서 여전히 풍요롭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서 믿음과 하느님과의 일치에 토대를 둔 확신에 찬 희망의 영적인 태도를 가꾸어 나가시도록 당부드립니다. 실제로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의 표징 중 일부는 이미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이 표징을 알아보고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아마도 다른 표징은 믿음과 증거 안에서 인내하며, 창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우리일 것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장래가 유망한 표징들 가운데, 저는 가톨릭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질문과 걱정을 털어놓는 수많은 젊은이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여러분이 이끌어온 확고한 사목활동을 계속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또한 저는 여러분이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동반하며, 튀르키예 교회가 특별히 봉사하도록 불린 분야들, 곧 그리스도교 일치와 종교 간 대화, 지역 주민에게 신앙의 전달,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사목 봉사 등과 같은 특별한 분야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고합니다.
이 측면은 성찰할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이 나라에는 이주민과 난민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한 이들을 환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도전을 교회에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튀르키예 교회는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분 중 많은 분도 - 사제, 수녀, 사목 종사자들 - 다른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는 튀르키예의 언어와 관습, 전통이 점점 더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토착화에 대한 여러분의 특별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복음의 전달은 이러한 토착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이 땅에서 여덟 번의 공의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올해는 제1차 니케아 보편 공의회 개최 1,7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와 온 인류 역사의 이정표”(프란치스코 교황, 국제 신학 위원회 연설, 2024년 11월 28일)이며, 제가 언급하고 싶은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해 주는 언제나 현실적인 일입니다.

첫째는 ‘신앙의 본질과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본질’을 되새겨야 할 중요성입니다. 신경에 관하여, 교회는 니케아에서 교회의 일치를 지켜 나갈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17항 참조). 그러므로 이는 단지 교리적인 정식일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감성과 영성, 문화 안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성과 교회 전통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치와 본질을 추구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새기도록 이끕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만장일치로 공동으로 고백한 신경은 이와 같이 식별의 기준, 방향의 나침반, 우리 믿음과 행동을 움직이는 중심축이 됩니다. 그리고 신앙과 자선활동 사이의 연관성과 관련하여, 저는 특별히 교회의 자선 활동을 지원하고 특히 2023년 지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준 ‘국제 카리타스’와 ‘교황청재단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에 대해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두 번째 도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재발견’해야 할 시급성에 관한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이 성부와 같으신 분이라고 확언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참모습과 인류와 역사에 대한 그분의 결정적 말씀을 발견합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에 상응하지 않는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의 믿음, 우리의 기도, 사목 생활과 전반적인 우리 영성의 형태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식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속에 존재하고 때로는 신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아리우스 부흥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또 다른 도전도 있습니다. 곧, 인간적인 존경심으로, 심지어 종교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그분을 정말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고 참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으로서 그분의 존재, 역사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모호해지고 그분을 그저 위대한 역사적 인물, 지혜로운 선생, 정의를 위해 싸운 예언자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제한시킵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를 향해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도전은 ‘신앙의 중재와 교리의 발전’입니다. 복잡한 문화적 맥락에서 니케아 신경은 당시의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범주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중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수십 년이 지난 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신경은 더 심화하고 확장되었고, 교리의 심화 덕분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이르게 되었고, 우리는 이 신경을 주일 미사 전례에서 공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곧,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과 다른 공의회 교부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의 언어와 범주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달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신경이 채택한 신앙의 핵심과 신경이 표현하는 역사적인 형식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신앙 정식과 형식은 항상 부분적이고 임시적이기에 우리가 교리를 더 심화할수록 조금씩 바뀔 수 있습니다. 새 교회학자로 선포된 존 헨리 뉴먼 성인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추상적이고 정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반영하기에,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을 주장했습니다. 곧 신앙의 근본적인 핵심을 더 잘 설명하고 밝혀주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내적 발전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이 민족을 많이 사랑했고 섬겼던 분으로, 여러분이 많이 아끼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느끼는 바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나라와 국민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예수회 건물 창문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어부들이 배 주변에서 그물 손질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썼습니다: “그 광경이 저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며칠 전 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어부들은 거기서 두려움 없이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영적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보스포루스 해협의 어부들을 본받으며, 각자 자신의 작은 배에서 횃불을 켜고 밤낮으로 일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중대하고도 신성한 의무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열정에 영감받아, 신앙의 기쁨을 간직하고 주님의 배에서 용감한 어부처럼 일하기를 축원합니다.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전구 해주시고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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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1월 2025, 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