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1월 16일
32.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과 화목하게 지내라는 명령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적대자'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분과 멀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야고 4,6)라고 하셨고, 또한 “모든 죄의 시작은 교만이며, 사람의 교만의 시작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집회 10,14-15)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이로써 우리는 아무리 악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원수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원수였던 이들조차 그분과 화해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애에서 하느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를 심판자에게 넘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장에서 앞서 언급된 모든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길 위에 있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는 점입니다. 만약 본문에서 하느님이 불경한 자들의 적대자[하느님을 거스르는 자들의 편에서 볼때 적대자]로 여겨지시고, 우리가 그분과 즉시 화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혹시 그분이 어디나 계시기에 우리가 길 위에 있을 때도 그분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성경에도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시편 139,8-1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은, 하느님께서 모든 곳에 계시지만, 마치 소경이 자기 눈을 감싸고 있는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불경한 자들이 하느님과 함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적대자'는 주님의 계명, 즉 그분의 율법과 이 삶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길을 걸을 때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가 심판자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우리가 그것에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에 가장 빨리 순종하고, 그 뜻에 동의해야 마땅합니다.
아무도 이 삶에서 언제 떠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경에 동의하는 사람일까요? 그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경청하며, 그 최고의 권위를 공손히 인정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이 자신의 죄를 단죄한다고 해서 그 내용을 책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훈계를 사랑하고, 자신의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치유받는 것에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모호하게 보이거나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내용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지 않고, 오히려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권위에 대해 선의와 경건한 존경을 표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런 사람일까요? 화를 내거나 다투려는 마음이 아니라, 경건함과 온유함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열고 그것을 알고자 다가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 5,5). 이제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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