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9 Auguri del Corpo Diplomatico 2026.01.09 Auguri del Corpo Diplomatico  (@VATICAN MEDIA)

[성좌 주재 외교단 알현 연설] 교황, “오늘날 인권과 자유는 위기에 처해 있고, 전쟁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인권이 “[전기]회로 합선”될 위기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증가로 인해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양심의 자유가 억압될 가능성이 있으며, 표현의 자유 또한 언어의 의미가 갈수록 유동적이고 개념도 갈수록 모호하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만다. 그뿐 아니라 전쟁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인도주의 법의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레오 14세 교황이 1월 9일 성좌 주재 외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몇 가지 개념을 골자로 연설했다.

성좌 주재 외교단에 행한
레오 14세 교황의 연설

베네디치오네 홀

2026년 1월 9일, 금요일

 

 

친애하는 대사님들,

존경하는 외교단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외교단 단장이신 조지 풀리데스 대사님께 여러분 모두를 대표하여 저에게 건네주신 친절하고 존경스러운 말씀에 감사드리며 새해를 맞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성좌 주재 외교단에게는 전통적인 행사이지만, 불과 몇 달 전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 부름받은 저에게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을 맞이하게 되어 기쁘고 특히 올해 카자흐스탄과 부룬디, 벨라루스에서 새로 부임하신 새로운 외교관들의 참석으로 더 풍성해져서 더 흐뭇합니다. 저는 해당 정부가 로마 성좌에 외교 공관을 개설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는 양국 관계가 훌륭하고 결실을 맺고 있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대사님들, 저는 여러분 모두를 통해 여러분의 나라에 축복을 비는 저의 인사가 전해지길 바라며, 갈수록 더 커지는 긴장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에 대한 시선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방금 마감한 한 해는 수많은 사건들로 풍성한 한 해였습니다. 열정적인 희년을 보냈고 저의 존경하는 전임 교황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등 교회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들로 시작된 해였습니다. 전 세계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장례식 날 그분의 관 주위에 모여, 깊은 목자의 사랑으로 하느님 백성을 이끄신 한 아버지의 죽음을 통감했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지난 2024년 성탄 축일 밤에 바로 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직접 여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마지막 성문 폐막식으로 닫았습니다. 이번 성년 동안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희년 순례를 위해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경험과 질문, 기쁨 뿐만 아니라 고통과 상처를 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지낸 성탄의 신비에서 묵상했듯이, 우리의 하늘의 의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오시어 우리의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신적 생명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이 성문 통과 의식으로 많은 분들이 주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새기거나 재발견하며, 삶의 도전과 마주할 위로와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는 세계 곳곳에서 이 도시를 찾아온 수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을 큰 인내심과 환대하는 마음으로 보살펴 주신 로마 시민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는 로마가 모든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리고 희년 행사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서거에 따른 이후 행사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열정적이고 치밀하게 노력해주신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시 행정부, 경찰청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성좌와 이탈리아는 지리적 근접성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와 이 아름다운 반도 및 그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오랜 신앙과 문화의 역사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양측의 훌륭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표이며, 올해 ‘이탈리아 군인 영적 지원 협정서’의 수정안이 발효됨으로써 이탈리아와 해외 여러 임무 수행에 임하는 군인들에 대한 영적 동반에 더 효과적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타 마리아 디 갈레리아 영농형 태양광 발전 사업 협정서’ 체결도 재생 가능한 자원을 통해 바티칸 시국에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피조물을 위한 공동의 책무를 재확인시켜 줍니다. 저는 또한 저의 교황 직무 초기에 방문해주신 국가의 고위 관리들과 ‘퀴리날레 궁에서 저를 극진히 환대해주신 이탈리아 대통령님’께 감사드립니다.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작년에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받으신 초대를 받아들여 튀르키예와 레바논을 방문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양국 당국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튀르키예의 이즈니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님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 대표들과 함께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기념하게 됐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완전하고 가시적인 일치를 향한 여정에 있어 헌신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레바논에서 저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만났고, 더 정의롭고 결속력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열망하며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믿음이 어우러져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향백나무의 나라로 만들려는 젊은이들에게서 풍겨지는 희망을 느꼈습니다.

친애하는 대사님들,

서기 410년 로마 약탈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신학적·철학적·문학적 저작 가운데 가장 강력한 작품 중 하나인 『신국론 (De civitate Dei)』을 집필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언급한 것과 같이, “역사상 서양 정치 사상의 발전과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 위대하고 결정적인 작품”이며,[1] 그 당시 널리 보급되던, 현대의 용어로 말하자면, “서사”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 당시 여전히 수가 많았던 이교도들과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새로운 종교의 하느님과 사도들이 도시를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신들의 시대에 로마는 ‘세계의 수도’(caput mundi), 위대한 도시였으며, 그 누구도 로마가 적의 손에 무너지리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과 함께, 이 큰 도시가 더 이상 안전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2]

물론 우리 시대는 그런 사건들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 거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과 사고방식의 발달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이 그 작품에서 자양분을 얻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고전이 그렇듯이, 그 작품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두 개의 도시라는 모델에 따라 사건과 역사적 현실을 읽어냅니다. 하느님의 도시, 곧 신국은 영원하며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amor Dei: 하느님 사랑)으로 특징을 이룹니다. 이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결합됩니다. 그리고 지상의 도시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일시적인 거주 장소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이 지상 도시는 가정에서부터 국가와 국제 기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총망라합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이 도시는 로마제국으로 구체화됐습니다. 지상 도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오만한 사랑(amor sui: 자기애)과 권력 및 세속적인 영광에 대한 욕망에 집중되어 결국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저 넘어 세상과 이 세상, 교회와 국가를 대립시키려는 역사에 대한 해석도 아니고, 시민 사회 안에서 종교의 역할과 관련된 변증법적인 논의를 다루지도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노적 관점에서, 두 도시는 세상 끝날까지 공존하며 외적인 차원과 내적인 차원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들이 역사 속에 세워진 외적인 태도 뿐만 아니라 삶의 현실과 역사적 사건에 직면한 모든 인간의 내적 태도로도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각자는 주인공이며 따라서 역사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고향인 천상의 도시를 향한 마음과 정신으로 지상의 도시에서 살도록 부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지상 도시에 살면서도 정치세계에 무관하지 않고, 성경에서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 윤리를 시민 정부에 적용하고자 노력합니다.

‘신국’(하느님의 도시)은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민족 간에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와 같은, 사회·정치적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귀중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역사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나 과도한 민족주의, 정치가의 왜곡된 이상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삶의 심각한 위험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이 5세기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몇 가지 유사한 점은 여전히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심각한 이주민 이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당시처럼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변화의 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 있습니다.[3]

우리 시대에 국제적 차원에서 다자주의의 취약성이 특히 우려됩니다. 대화를 증진하고 모두의 동의를 추구하는 외교가 무력 외교와 개별 외교 혹은 동맹 집단의 외교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유행처럼 다시 돌아왔고 전쟁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국가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확립된 원칙이 깨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4] 평화를 더 이상 그 자체로 선물이자 선익으로 여기며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건인 무기를 통해 추구하려 합니다. 이는 모든 평화로운 시민 공존의 기반인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더욱이 성 아우구스티노가 설명한 것과 같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조차 승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통해 영광스러운 평화에 이르기를 열망합니다. 실제로 승리란 저항하는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이러한 일이 이뤄지면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 심지어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가 깨지기를 바라는 이들조차, 평화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권력으로 이어지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평화가 없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5]

바로 이런 태도가 인류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몰아넣었고, 나중에 그 폐허 속에서 얼마 전 80주년을 지낸 유엔이 탄생했습니다. 유엔은 미래의 세계적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평화를 수호하고 기본 인권을 보호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다자간 협력의 초석으로 51개국의 결의에 따라 설립됐습니다.
저는 특히 국제 인도법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국제 인도법 준수는 상황이나 군사적이고 전략적인 이익에 좌우될 수 없습니다. 인도(주의)법은 전쟁의 참상 중에 최소한의 인도적 대우를 보장하는 것 외에도, 국가들이 약속한 책무입니다. 이는 전쟁의 파괴적인 영향을 완화하고 재건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언제나 전쟁 당사국의 야심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병원과 에너지 기반시설, 주택 및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장소의 파괴는 국제 인도법의 심각한 훼손이 된다는 점을 침묵할 수 없습니다. 성좌는 어떠한 형태로든 군사작전에 민간인의 참여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제사회가 인간 존엄의 불가침성과 생명의 신성함을 보호하는 원칙이 그 어떠한 국가적 이익보다 항상 우선한다는 점을 명심하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엔은 분쟁을 중재하고 개발을 촉진하며 인권과 기본 자유를 보호하는 데 국가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지정학적 긴장과 불평등, 기후 변화와 같은 복잡한 도전을 거친 세계에서 유엔 기구는 대화와 인도적 지원을 장려하고 더 정의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엔이 전후 세계 상황이 아닌 오늘날의 세계 상황을 반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념이 아니라 인류 가족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더 지향적이고 효율적인 기구가 되도록 필수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자주의의 목표는 고대 로마의 ‘포럼’이나 중세 광장을 모델로 삼아, 사람들이 서로 만나 대화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려면 사용하는 단어와 그 단어들이 나타내는 개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말이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고 현실 자체가 논쟁의 여지가 생기며 궁극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해질 때,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듯이, 서로의 언어를 알지 못한 채 함께 지내야 하는 두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주목합니다. “말 못하는 동물들은 비록 다른 종일지라도, 그들보다는 더 쉽게 이해합니다. 그들이 둘 다 사람이더라도 말입니다. 실제로 단지 언어 차이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서로에게 표현할 수 없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리 타고난 친화력이 크더라도 사람은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자신의 개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할 정도로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6]

오늘날 단어의 의미가 점점 더 유동적이 되고 단어가 나타내는 개념도 점차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언어는 더 이상 인간 본성이 서로를 알고 만나기 위한 특권적인 수단이 아니라, 의미의 모호함이라는 참상 속에서, 갈수록 적을 속이거나 공격하고 모욕하는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현실을 명확하게 표현해내는 단어가 필요합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 오해 없이 진정한 대화를 재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집과 광장, 정치판에서 일어나야 하고, 홍보 수단과 소셜 미디어 분야에서, 그리고 국제관계와 다자주의라는 맥락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자주의가 갈등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 만남과 중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되찾고, 그 누구도 언어적이고 물리적인 힘 혹은 군사적인 힘의 논리로 타인을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단어가 약화되는 현상의 역설이 종종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주장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입니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바로 언어의 확실성과 모든 용어가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보장됩니다. 그러나 특히 서양에서는 진정한 표현의 자유가 점점 축소되는 반면, 조지 오웰의 어조가 스며든 새로운 언어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 유감스럽습니다. 이러한 언어는 점점 더 포용적인 것이 되려고 애쓰지만, 결국 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경향에서 양심의 자유를 비롯하여 개인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는 개인이 깊이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혹은 종교적 원칙과 반대되는 법적이나 직업적 본성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이거나 혹은 의사와 의료 종사자들이 낙태나 안락사 같은 행위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반역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충실한 행위입니다. 특히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국가들조차 양심의 자유를 점점 더 의문에 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집단적 이익과 개인의 존엄성 사이에 균형을 확립하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는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권위주의적 경향을 방지하며 사회 구조를 풍요롭게 하는 윤리적 대화를 촉진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가 위축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상기하신 것과 같이, 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현실을 표현하기 때문에 인권 중 첫째가는 권리입니다.[7] 최근 자료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가 침해된 경우가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64%가 이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를 겪고 있습니다.

성좌는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존중을 요구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 공동체에도 동일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1965년 12월 8일에 폐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실 중 하나인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반포 60주년을 맞아, 저는 모든 형태의 반유다주의를 강력히 거부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지만, 안타깝게도 반유다주의는 여전히 증오와 죽음을 조장하고 있어서, 유다교-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증진하고 공통된 성서적 뿌리를 심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다른 종교 대표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종교 간 대화의 길에서 이뤄진 진전에 대해 다시금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된 종교적 탐구 속에는 “모든 창조물을 포용하는 하나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반영”이 있기 때문입니다.[8] 이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국가 공동체가 자국 시민들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가장 널리 퍼진 인권 위기 중 하나이며, 전 세계 3억800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신앙으로 인해 심각하거나 극심한 차별과 폭력,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현상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 7명 중 한 명에 해당되며 진행 중인 분쟁, 권위주의 정권, 종교적 극단주의로 인해 2025년에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자료는 종교의 자유가 많은 상황에서 기본적인 인권이라기보다는 “특권”이나 양보로 여겨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방글라데시와 사헬 지역,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종교적 동기로 특정되는 수많은 폭력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6월 다마스쿠스 성 엘리아스 본당에서 일어난 심각한 테러 공격의 희생자들, 그리고 모잠비크의 카보 델가도에서 발생한 지하디스트 폭력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특별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미묘한 형태의 종교적 차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차별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처럼 수적으로 다수인 국가에서도 확산되고 있으며, 특히 가장 연약한 이와 신생아들이나 난민과 이민자들의 존엄성을 옹호하거나 가족을 장려할 때 정치적 또는 이념적인 이유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성좌는 국제 관계 및 활동에 있어 모든 인간의 불가침적인 존엄성을 옹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이주민은 한 사람의 인격체이며,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든 존중되어야 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이주민이 선택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그런 것과 같이 폭력과 박해, 분쟁, 심지어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국제이주기구(IOM) 창립 75주년을 지내는 올해, 저는 각국이 불법 이민과 인신매매에 맞서 취하는 조치들이 이주민과 난민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구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성좌의 기대를 다시 한번 밝힙니다.

수감자들에게도 동일한 고려 사항이 적용됩니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기준으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이 기회에, 저는 존경하는 저의 전임 교황님이 희년 동안 사면을 촉구하신 호소에 긍정적으로 응답해준 각국 정부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희년의 정신이 사법 행정에 영구적이고 구조적으로 반영되어 범죄에 비례하는 형벌이 집행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한 존엄한 처우와 인권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와 재활의 희망을 모두 없애 버리는 사형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여야 합니다.[9] 우리는 수많은 국가에서,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많은 이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존재로 부르셨고 인간에게 사랑의 소명을 주셨습니다”.[10] 이러한 소명은 가정 안에서 특별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삶에 봉사하는 역량을 기르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발전과 교회의 사명에 기여하게 됩니다.

중심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족 제도는 두 가지 중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편으로, 국제적 체계에서 가족 제도의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을 경시하고 과소평가하는 우려스러운 경향을 보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제도적 소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폭력을 포함한 내부적인 어려움과 불안정한 현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갈수록 취약하고 해체되어 가며 고통받는 가족들의 더 심각해지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명은 남녀 간의 배타적이고 불가해소적 결합에서 탁월하게 드러나며, 근본적인 윤리적 의무를 부과합니다. 곧, 가정에 태어날 생명을 환영하고 온전히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히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사실 생명은 상호성과 봉사에 기반한 관계성이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발전하는 값진 선물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할 선물로 여기고 가정을 그 선물의 책임 있는 수호자로 여기는 이러한 심오한 비전에 입각해서, 생명의 기원과 발달을 부정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 중 하나가 낙태인데, 이는 이제 막 태어나는 생명을 중단시키고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 같은 경우, 성좌는 소위 “안전한 낙태를 받을 권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을 지원하는 사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공공 자원이 산모와 가정을 지원하는 데 투자되기보다 오히려 생명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합니다. 최우선 목표는 모든 신생아를 보호하고 모든 여성이 생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임신 기간을 거래 가능한 서비스로 변질시킴으로써 어린이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어머니의 신체와 출산 과정을 착취하며 가정이라는 본래 관계성의 프로젝트를 변형시켜 어린이와 어머니의 존엄성마저 침해합니다.

이와 유사한 고려 사항은 때때로 삶을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는 환자와 노인들,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시민 사회와 국가도 취약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완화 치료와 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안락사와 같은 허구적인 동정심을 조장하기보다는 진정한 연대의 정책을 장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약물 중독을 비롯한 수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린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성찰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약물 사용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인류의 재앙인 마약 중독과 이를 키우는 마약 밀매를 타파하기 위하여 모두의 힘을 합쳐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적절한 중독 회복 정책이 필요하며, 인적 개발과 교육, 일자리 창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도전에 비추어볼 때, 생명권 보호가 다른 모든 인권의 필수적인 토대를 이룬다는 점을 강력히 거듭 강조해야 합니다. 사회가 건강하고 진보적이라는 것은 오직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보호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증진하기 위해 노력할 때뿐입니다.

제가 제시한 고려 사항들은 현재 상황에서 그야말로 인권의 “[전기]회로 합선”되는 것이 입증된다고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심지어 생명에 대한 권리도 소위 새로운 권리라는 명목으로 제한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인권이라는 장치 자체가 효력을 잃게 되어 폭력과 억압에 자리를 내어주고 맙니다. 이런 현상은 각각의 권리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사물의 현실, 본질, 진실과의 연결고리를 잃을 때 발생합니다.

 

존경하는 대사 여러분,

성 아우구스티노가 하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세상 끝날까지 공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면, 우리 시대는 오히려 신국(하느님의 도시)에 대한 “시민권”을 부인하려는 경향으로 기우는 듯이 보입니다. 오직 그 경계 안에 예외적으로 갇혀있는 지상 도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재적인 선만 추구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평화의 본질을 이루는, “질서의 평온”을 약화시킵니다.[11] 평화는 사회와 국가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 자체와도 관련이 있으며, 모든 시민의 공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토대가 부족하면, 오로지 자기애만 우세해져서 지상의 도시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12] 그럼에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설명하듯이, “선의 목표를 현재 삶에 두고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교만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13]

교만은 현실 자체를 흐리게 하고 이웃에 대한 공감 능력을 저해합니다. 모든 갈등의 기원에 언제나 교만의 뿌리가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제가 언급한 것과 같이,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어둠과 공포로 일그러진 세상을 바라보는 편향되고 왜곡된 관점에 휩쓸리고 맙니다.”[14] 이와 같이 모든 전쟁의 전조 증상인 갈등의 논리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과 민간인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부담을 비롯한 수많은 상황에서 이런 조짐을 목격합니다. 이 같은 극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성좌는 즉각적인 휴전과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 진솔한 방안을 모색하는 대화의 시급성을 확고히 재확인합니다. 저는 국제 사회가 가장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찾아주기 위한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데 노력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며 성좌가 평화와 화합을 증진하는 모든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의향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지[중동지역]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게 됩니다. 10월에 발표된 휴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은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는 이미 겪고 있는 고통에 추가적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성좌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팔레스타인 국민 전체, 그리고 이스라엘 국민 전체에게 자신의 땅에서 지속적인 평화와 정의의 미래를 보장하도록 마련해주는 모든 외교적 노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두 국가에 대한 해법은 양국 국민의 합법적인 열망을 충족시키는 제도적 관점으로 남아 있지만, 안타깝게도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카리브해와 미국 태평양 연안을 따라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히 우려합니다. 저는 당파적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국민의 공동선을 품으면서, 현 상황에 대한 평화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다시 한번 간곡히 호소합니다.

최근에 전개된 사건들에 이어, 이는 특히 베네수엘라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베네수엘라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시민권을 보호하며, 안정과 화합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헌신할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지난 10월 제가 시성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던 베네수엘라의 두 성인, 호세 그레고리오 에르난데스와 카르멘 렌딜레스 수녀님의 모범에서 영감을 받아, 정의, 진리, 자유, 형제애에 기반한 사회를 건설하고, 오랫동안 이 나라를 괴롭혀 온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계 곳곳에서 다른 위기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먼저 인신매매와 강제 추방, 납치 등 온갖 폭력으로 점철된 아이티의 참혹한 상황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국제 사회의 필수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을 통해 해당 국가가 조속히 민주 질서를 재확립하고, 폭력을 종식시키며, 화해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또한 수십년 동안 수많은 희생자를 낸 폭력의 온상이었던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의 상황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관련 당사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확실하고 공정하며 지속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촉구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단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수단은 거대한 전쟁터로 바뀌었고, 남수단은 15년 전 국민투표로 탄생했고, 국제 사회에서 가장 젊은 국가이지만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조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관련 당사국들이 잠재적 갈등의 원천이 되는 분쟁 사안에 대해 평화적이고 대화에 기반한 접근 방식을 채택하길 희망합니다.

저는 특히 지난 3월 발생한 파괴적인 지진으로 더욱 악화된 미얀마를 괴롭히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와 안보 위기를 생각합니다. 저는 더욱 강력한 의지를 담아 평화와 포용적인 길을 용감하게 선택하고, 모든 사람이 공정하고 시의적절하게 인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추구하고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며 모든 개인의 전인적 발전을 촉진하려는 정치적 의지에 민주주의 절차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의 상당수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직접 강조했듯이, 평화는 오직 무력과 억지력의 효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항상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한편, 전쟁은 파괴에만 만족하는 반면, 평화는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건설의 노력과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을 비롯한 모든 국가에 도전 과제를 안겨줍니다. 특히 저는 오는 2월에 만료되는 신전략무기감축조약(Vew START)의 중요한 후속 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점은 인공지능까지 동원해서 점점 더 정교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려는 경쟁 속에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적절하고 윤리적인 관리가 필요한 도구이며, 인간의 책임과 자유 보호에 초점을 맞춘 법규 체계가 요구됩니다.


친애하는 대사 여러분,

우리 눈앞에 펼쳐진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어렵지만 여전히 실현 가능한 선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평화는 “우리의 선의 목표입니다.”[15] 왜냐하면 평화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열망하고, 지상의 도시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하느님의 도시의 진정한 최종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순례하는 시간 동안, 평화는 우리에게 겸손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진리의 겸손과 용서의 용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겸손과 용기는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Verbum), 곧 진리(Veritas)가 겸손한 인간(umile carne: 비천한 살)이 되신 성탄 신비에서 드러나고, 사형 선고를 받으신 의로우신 분(Giusto: 정의의 임금)께서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부활하신 분(Risorto)의 생명을 주신 파스카 신비에서 드러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시대에도 용기 있는 희망의 표징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이 희망은 끊임없이 지지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30년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종식시킨 데이턴 협정을 생각합니다. 이 협정은 어려움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더욱 번영하고 조화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또한 지난 8월에 체결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평화 공동 선언을 생각합니다. 이 선언이 남캅카스 지역에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고, 양측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주길 바랍니다. 유추해보며 최근 몇 년 간 베트남 당국이 성좌와의 관계 개선 및 베트남 내 교회 활동의 환경 개선을 위해 기울인 노력들을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꾸어야 할 평화의 씨앗입니다.

오는 10월은 평화와 대화의 인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인정받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서거 800주년이 되는 달입니다. 그의 삶은 진리에 대한 용기와 평화로운 세상이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천상의 도시를 향해 나아간다는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빛납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국가들의 모든 국민에게 겸손하고 평화를 이루는 마음이 깃들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 Benedetto XVI, Catechesi (20 febbraio 2008).
[2] Ibid.
[3] Cfr Francesco, Discorso al V Convegno Nazionale della Chiesa Italiana, Firenze (10 novembre 2015).
[4] S. Paolo VI, Lett. enc. Populorum progressio (26 marzo 1967), 76: AAS 59 (1967), 294-295.
[5] S. Agostino, De Civ. Dei, XIX, 12.1.
[6] S. Agostino, De Civ. Dei, XIX, 7.
[7] Benedetto XVI, Discorso in occasione della presentazione degli auguri al Corpo Diplomatico, 9 gennaio 2012.
[8] Catechesi (29 ottobre 2025).
[9] Cfr Francesco, Bolla di indizione del Giubileo Ordinario dell’anno 2025 “Spes non confundit” (9 maggio 2024), 10: AAS 116 (2024), 654-655.
[10] S. Giovanni Paolo II, Esort. ap. Familiaris consortio (22 novembre 1981), 11: AAS 74 (1982), 91.
[11] Cfr S. Agostino, De Civ. Dei, XIX, 13.
[12] Ibid., XIV, 28.
[13] Ibid., XIX, 4. 4.
[14] Messaggio per la LIX Giornata Mondiale della Pace (8 dicembre 2025).
[15] S. Agostino, De Civ. Dei, XIX, 11.

[1] 베네딕토 16세 교황, 교리교육 (2008년 2월 20일).
[2] 상동.
[3] 프란치스코 교황, 제5차 이탈리아 교회 전국 대회에서 연설, 피렌체 (2015년 11월 10일) 참조).
[4] 성 바오로 6세 교황, 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년 3월 26일), 76: AAS 59 (1967), 294-295.
[5]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 Dei), XIX, 12.1.
[6]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 Dei), XIX, 7.
[7]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좌 주재 외교단 신년연설, 2012년 1월 9일.
[8] 교리교육 (2025년 10월 29일).
[9] 프란치스코 교황, 2025년 희년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2024년 5월 9일), 10: AAS 116 (2024), 654-655.
[10]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1981년 11월 22일), 11: AAS 74 (1982), 91.
[11]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 Dei), XIX, 13 참조.
[12] 같은 곳, XIX, 28.
[13] 같은 곳, XIX, 4.4.
[14]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25년 12월 8일).
[15]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 Dei), XIX, 11.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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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월 2026, 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