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Papa, viviamo un'ora oscura della storia, mondo conteso e devastato Il Papa, viviamo un'ora oscura della storia, mondo conteso e devastato  (ANSA)

레오 14세 교황: “역사의 어두운 시간, 평화 가져오는 그리스도교적 사명을 갱신해야 합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즉위 후, 첫 성유 축성 미사를 집전하며 그리스도교적 사명의 의미를 성찰했다. 교황은 사목과 사회, 정치의 영역에서 “선(善)은 결코 강압을 통해 나올 수 없다”고 강조하며, 참된 사랑은 “무장 해제된 상태”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세상을 파괴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국주의적 점령”을 저지하고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언급했다. 교황은 강론 중 1980년 제단에서 피살된 산살바도르의 대주교, 성 오스카르 로메로를 사명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레오 14세 교황 성하의 강론
성유 축성 미사

성 베드로 대성전
2026년 4월 2일 성목요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를 당신 사명의 정점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우리의 사명의 핵심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살아가게 될 이 신비는, 인간의 교만이 흔히 굳어지게 만드는 것들, 곧 우리의 정체성과 세상 안에서의 자리마저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마음을 변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며,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하고 향기를 풍기게 하며, 화해시키고 한데 모아 주며,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제가 로마의 주교로서 처음으로 성유 축성 미사를 주례하는 이 해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서 우리를 축성하시어 맡기신 사명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이 사명은 그리스도교적 사명이며, 예수님의 사명과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각자는 자신의 소명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목소리에 대한 각자 고유하고 유일한 방식에 따른 순명 안에서 이 사명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이들 없이는 안 되며, 친교를 소홀히 하거나 깨뜨려서도 안 됩니다! 주교와 사제인 우리는 서약을 새롭게 하며 선교하는 백성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세례 받은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자유와 위로의 영, 예언과 일치의 영이신 그분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의 절정에서 겪으신 일들은 이사야의 예언에 미리 나타나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루카 4,21 참조). 파스카의 시간에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파견하기 위해 축성하신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과 연결하는 그 움직임을 설명하시며 “나를 보내셨다”(루카 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몸의 지체인 우리는, 자신을 넘어 밖으로 나아가고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위한 봉사 속에 하느님께 봉헌된 교회를 ‘사도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우리는 파견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떠남’, 즉 새로움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 익숙하고 확실한 것을 뒤로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뒤 “성령의 힘으로”(루카 4,14) 갈릴래아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루카 4,16)으로 가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떠나야 할 장소가 됩니다. 그분은 “늘 하시던 대로”(16절) 움직이시지만,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그분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경청하며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싹틔워 온 것들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그 마을을 완전히 떠나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다른 이들도 떠나도록, 위험을 감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장소도 울타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그 어떤 정체성도 은신처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신”(필립 2,6-7) 예수님을 따릅니다. 모든 사명은 바로 그와 같은 자기 비움에서 시작되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존엄은 결코 빼앗길 수 없고 사라질 수도 없고 우리 삶의 뿌리가 된 감정, 장소, 경험들 또한 지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선익을 물려받은 상속자인 동시에, 복음이 빛과 구원, 용서와 치유를 가져다 주어야 할 역사의 한계 또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원과, 우리가 받은 양성의 은총 및 한계와 화해하지 않고서는 사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떠남 없이는 평화가 없고, 버림 없이는 깨달음이 없으며, 위험 없이는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정리하되 과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두려움 없이 먼저 내어줄 때 모든 것을 다시 찾고 배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의 첫 번째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한 번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시 시작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파견될 때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에서, 잃고 비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만남과 친교의 조건임이 드러납니다. 사랑은 무장 해제되어 있을 때에만 참되며,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과시를 요구하지 않으며, 연약함과 벌거벗음을 섬세하게 지켜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방비로 노출된 사명에 자신을 던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표지를 지닌 채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간다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루카 4,18 참조)은 있을 수 없으며,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참된 해방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사명의 두 번째 비밀에 이르게 됩니다. 떠남의 법칙 다음에는 만남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전혀 무관한 지배의 논리에 의해 왜곡된 적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고백할 용기와 통찰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신비체 안에서 서로를 결합시키는 그 유대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개인적인 책임이 없을지라도, 또 오직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의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의 오류와 잘못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1]

따라서 이제는 사목적 영역에서든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든, 선은 결코 억압이나 지배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위대한 선교사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이들의 증인입니다. 그들의 방법은 삶을 공유하고, 사심 없는 봉사를 하며, 어떠한 계산적 전략도 포기하고, 대화하며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생의 길이며, 언제나 다시 ‘문화화’의 형태를 취합니다. 사실 구원은 각자의 모국어로 들릴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8). 우리가 하느님의 때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성령을 신뢰할 때, 오순절의 놀라움은 다시 일어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계시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고,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잘 일하십니다. 성령을 심거나 깨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알아보고, 환대하며, 돕고, 길을 열어드리고, 그분 뒤를 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분은 계시며, 우리 시대에 대해 결코 낙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미소 짓고, 춤추며, 스며들고, 휩싸며, 우리가 상상조차 못 했던 곳까지 도달하십니다.” [2]

이 보이지 않는 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과 모든 공동체가 지닌 신비를 존중하며 단순한 마음으로 파견된 곳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손님입니다. 주교로서,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대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속화가 가장 심하게 진행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은 정복이나 재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의미의 촉진자나 생성자가 되지 못하고, 복음과는 상반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다른 언어, 상징, 메시지,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 거대한 인간 지형 속에서 새로운 문화는 계속 생성되고 있습니다. […] 새로운 이야기와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곳에 도달해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으로 도시 영혼의 가장 깊은 핵심에 닿아야 합니다.”[3]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걸을 때에만, 사명이 누군가의 영웅적인 모험이 아니라 지체가 많은 한 몸의 살아있는 증언이 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명에는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세 번째 차원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보여준 격렬한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오해와 거부라는 비극적인 가능성이 이미 드러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루카 4,28-29). 비록 오늘 전례 독서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우리가 오늘 저녁부터 거행하게 될 신비는 우리에게 시련을 피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십자가는 사명의 일부입니다. 파견은 더욱 쓰라리고 두려워지겠지만, 동시에 더 무상적이고 더 폭발적인 힘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점령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오늘날까지 법처럼 군림하던 폭력은 그 가면이 벗겨집니다. 가난하고 갇혔으며 거부당한 메시아께서는 죽음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시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빛으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방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봉사 속에 자신을 낮출 때,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까! 삶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의 부족함 때문에, 혹은 책임과 빛과 어둠이 뒤섞인 복잡한 상황 때문에 실패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증인의 희망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가 특히 아끼는 두 분을 기억합니다. 성 오스카르 로메로 주교님은 선종 한 달 전 피정 수첩에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코스타리카 교황 대사가 이번 주에 닥칠 임박한 위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맞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교자들을 도우셨고, 만약 필요하다면 제가 마지막 숨을 그분께 맡길 때 그분을 아주 가까이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보다 중요한 것은 온 삶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 내 삶과 죽음이 그분 안에 있다는 확신, 나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신뢰를 두었기에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다른 이들이 더 큰 지혜와 거룩함으로 교회와 조국을 위한 일을 이어갈 것이라는 확신만으로도 저는 행복하고 든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인들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요한 묵시록의 메시지입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묵시 1,5). 이 인사는 세상을 파괴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이 세상 속 예수님의 여정을 요약해 줍니다. 그 안에서 희생자가 아닌 증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백성이 일어납니다. 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시어, 죽음의 냄새가 지배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치를 요구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 사명에 다시 한 번 “예”라고 응답합시다. 예, 주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무력감과 두려움을 넘어섭시다!

주님, 저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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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요한 바오로 2세, 2000년 대희년 선포 칙서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 1998년 11월 29일), 11항.
[2]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성령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Tre racconti dello Spirito), 밀라노 1997, 11쪽.
[3]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년 11월 24일), 73-74항.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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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4월 2026,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