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4 Enrique Shaw 2025.01.14 Enrique Shaw 

12명의 새 복자 탄생... 11명의 스페인 순교자와 1명의 아르헨티나 평신도

레오 14세 교황이 20세기 스페인 내전 중에 순교한 신학생 9명, 신부 1명, 평신도 1명과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사업가로 다양한 교회 사업에 헌신한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를 복자품에 올리는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아울러 12월 18일부터 이탈리아 출신 베라르도 아톤나 수사와 성령의 도메니카 카테리나 수녀, 인도 출신 조셉 판지카란 신부가 가경자로 공포됐다.

Tiziana Campisi

 

레오 14세 교황이 12월 18일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의 예방을 받고 12명의 새 복자들에 대한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새 복자들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순교한 신학생 9명, 교구 신부 1명, 평신도 1명 등 11명과 1962년 선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사업가인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가 포함된다. 또한 영웅적 덕행을 인정받은 3명의 새 가경자도 선포됐다. 이들은 이탈리아 출신 베라르도 아톤나 수사와 성령의 도메니카 카테리나 수녀, 인도 출신 조셉 판지카란 신부다.

스페인의 순교자들
스페인 순교자는 11명으로,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벌어진 격렬한 반그리스도교 박해 때 현재의 마드리드교구, 헤타페교구, 알칼라데에나레스교구에서 순교했다. 군 입대를 거부하고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이그나치오 알라에즈 바케로 신학생은 1936년 11월 9일 아버지와 함께 순교했다. 그와 함께 순교자로 인정받은 이들로는 파블로 초몬 파르도 신학생과 그의 삼촌이자 시엠포주엘로스의 예수 성심의 병원 수녀회 지도 사제였던 훌리오 파르도 페르니아 신부로, 이들은 1936년 8월 8일 순교했다. 안토니오 모랄레호 페르난데스 쇼 신학생과 그를 변호하려다 체포된 그의 아버지 리베라토 모랄레호 후안은 함께 순교했다. 또한 신학생이었던 헤수스 산체스 페르난데스 야네즈, 미겔 탈라베라 세비야, 앙헬 트라페로 산체스 레알도 순교했다. 특히 카스토르 사르코 가르시아는 예비군으로 강제 징집된 뒤 온순한 행동을 이유로 일부 동료들의 고발을 받았으며, 온갖 모욕을 당하고 자신의 무덤을 파도록 강요당한 후 순교했다. 마리아노 아리사발라가 에스파뇰과 라몬 루이스 페레스 신학생은 20여 명의 평신도들과 함께 고문을 당하고 투옥됐다가 순교했다. 이들 모두는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순교는 당시 스페인에 만연했던 반가톨릭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방대한 자료를 보면 신학생들이 교회의 일원들을 향한 반그리스도교적 증오를 알면서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숨지 않고 가족과 친구들 곁을 지켰던 그들의 순교자적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
1921년 2월 26일 파리에서 태어나 가족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한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도 복자품에 오른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젊은이였던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오랜 항해 기간 동안 해병들에게 교리교육을 실시했다.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자신의 모든 직원과 형제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교회의 사회교리 원칙을 기업 경영에 적용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체칠리아 분게와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가톨릭 액션(가톨릭 운동)과 그리스도인 가정 운동에 참여했고, 노동 관련 다양한 단체들을 후원하며 강연, 기사, 에세이 등을 발표했다. 1961년 가톨릭 액션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는 1962년 8월 27일 암으로 선종했다. 2015년 6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의 농장에서 말의 발에 뒤통수를 차이는 사고를 당한 다섯 살 남자 아이가 엔리케 에르네스토 쇼의 전구로 기적적으로 치유됐다. 이 사고로 아이는 심각한 두개골 및 뇌 손상을 입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7월 15일, 의사들은 아이의 뇌실 크기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 2019년, 두 명의 전문가에게 아이를 진찰한 결과, 건강 상태가 양호하며 신경학적으로 심각한 후유증도 없었다. 현재 그 아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베라르도 아톤나 수사
12월 18일 가경자로 선포되는 베라르도 아톤나(세속명 주세페) 수사는 1843년 7월 1일 살레르노주 사르노의 에피스코피오에서 다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알칸타라 작은 형제회의 나폴리 산타 루치아 알 몬테 수도원에 입회했다. 1866년 2월 18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캄파니아, 라치오, 움브리아, 풀리아 지역에서 민중 선교에 헌신했으며, 다양한 직책을 맡으면서 수도 생활에 대한 큰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러 인물들을 알게 되어 영적으로 풍성한 교류를 이어갔는데, 그 중에는 성 바르톨로 론고, 성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브란도, 복녀 세라피나 미켈리 등이 있다. 그는 나폴리의 여성 노인들을 위한 “빌라 피오릴로”와 고아 돌봄 시설 등 자선 단체를 설립한 안토니에타 피오릴로의 영성지도 신부가 됐다. 이 단체의 영성 지도를 맡았던 베라르도 수사는 허위 고발과 고소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무혐의로 밝혀졌다. 그는 1917년 3월 4일에 선종했다. 베라르도 수사는 기도로 양육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마리아 중심의 강렬한 영적 삶을 살았다. 특히 성 요셉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던 그의 삶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에 힘입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과 함께 어려운 시기에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늘 헌신했으며,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베라르도 수사는 가난하게 살면서 가진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부유한 이들에게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대하게 베풀 것을 권유했다.

성령의 도메니카 카테리나 수녀
리구리아 지방의 키아바리 근처 네라는 작은 마을 출신인 성령의 도메니카 카테리나(세속명 테레사 솔라리) 수녀는 1822년 12월에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여러 질병에 시달리며 오랜 기간 입원해야 했다. 그녀는 1855년 또 다른 젊은 환자 안토니에타 체르베토와 친분을 쌓았고, 1863년 함께 가난한 소녀들에게 도덕적, 물질적 지원을 베푸는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인 빈첸시오 베라 신부의 영적 지도 아래 몇 년 후 “하느님의 섭리의 작은 집”으로 발전했고, 1870년 6월 4일 테레사는 새 공동체의 수도복을 입고 성령의 도메니카 카테리나 수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후 수녀회가 도미니코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수녀들은 도미니코회에 공식적으로 소속되기를 요청했고, 이는 도메니카 카테리나 수녀가 1908년 5월 7일 제노바에서 선종한 후에 이루어졌다. 도메니카 수녀는 기도로 성장하고 깊은 성모 신심으로 향하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신앙심을 키웠다.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은 어려움에 처한 젊은 여성들을 돕고 지원하는데 헌신하도록 이끌었다.

조셉 판지카란 신부
가경자 조셉 판지카란 신부는 1888년 9월 10일 인도 케랄라주의 우주바에서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에 속한 대가족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서 사제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8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여러 직무를 거친 후 1924년 1925년 정기 희년을 맞아 개최된 세계 선교박람회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의 책임자가 되어 로마에 파견됐다. 인도에 돌아온 그는 코타만갈람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의료시설 다르마기리(자선의 산) 병원을 건립하는 데 헌신했으며, 이 병원 운영을 위해 성 요셉 의료 수녀회를 설립했다. 조셉 판지카란 신부는 1949년 11월 4일 선종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수많은 어려움을 큰 믿음과 관대함으로 극복해 나갔다.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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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2월 2025,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