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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8 Celebrazione eucaristica in occasione del Giubileo dei Catechisti 2025.09.28 Celebrazione eucaristica in occasione del Giubileo dei Catechisti  (@Vatican Media)

[강론] 교황, “사치스러움은 전쟁으로 착취 당하고 고통받는 많은 민족의 비참함을 유발합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9월 28일 ‘교리교사들의 희년’ 미사 강론에서 5만 명의 신자들에게 “탐욕”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있는 비극 속에도 “모든 이의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복음을 알고,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증거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마음에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교리교사들의 희년
주일 미사
레오 14세 교황 강론
성 베드로 광장
2025년 9월 28일, 연중 제 26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루카 16,19-31)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와 부자, 굶주림으로 죽는 이와 그 앞에서 배불리 먹는 이를 지켜 보셨습니다. 세련된 옷을 입은 이와 개들이 와서 상처를 핥는 이(루카 16,19-21 참조)를 보십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며, 그분의 눈을 통해 우리는 가난과 무관심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라자로는 집 문 바로 너머 그의 앞에 있던 이들에게 잊혀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곁에서 함께하시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하지만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고, 이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물질로 가득 차 사랑이 없는 그의 마음은 생각들로 길을 잃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그를 선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매우 현실적입니다. 오늘날 풍요의 문 앞에는 전쟁과 착취로 시달리는 온 민족의 비참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의를 잊은 탐욕, 사랑을 짓밟는 이익,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눈 먼 부유함 앞에서 얼마나 많은 라자로가 죽어가는지요! 그러나 복음은 라자로의 고통이 끝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부자의 흥청망청한 잔치가 끝난 것처럼 그의 고통도 끝나고,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22절). 교회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주님의 이 말씀을 끊임없이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주 우연히도 이 복음 구절이 ‘자비의 희년’ 중 ‘교리교사들의 희년’ 행사 중에 선포되었습니다. ‘자비의 희년’을 위해 로마에 온 순례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악에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고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그분의 행위가 우리 사명의 시작인 것은 우리 자신을 공동선을 위해 바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교리교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회전하는 이 중심,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이 뛰는 심장이 부활의 선포, 최초의 선포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그분께서는 여러분 곁에 계시고 매일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2016년 9월 25일, 강론). 이 말씀은 우리가 복음에서 들었던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를 성찰하게 합니다. 이 대화는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청이고,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는 간청입니다.

실제로 부자는 아브라함과 대화하면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루카 16,30)이라고 외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31절)이라고 답합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 섭리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로 알려지고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를 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끌고, 하느님의 말씀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리교사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직무를 칭하는 단어는 ‘구두로 가르치고, 울려 퍼지게 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카테케인’(katēchein)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곧 교리교사는 말씀의 사람,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교리교사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말씀하셨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우리가 모국어를 배운 것처럼 신앙의 선포는 다른 이에게 위임할 수 없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서, 우리 식탁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목소리, 몸짓, 얼굴이 있을 때 가족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증언을 통해 믿음을 배웠습니다. 유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와 성인기, 심지어 노년기까지도 교리교사들은 지난 며칠 동안 여러분이 희년 순례에서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여정을 나누면서 믿음 안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이러한 역동성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하느님의 백성이 사람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동안 “전해진 것들과 말씀들에 대한 이해가, 마음 깊이 그것을 새겨 간직하는(루카 2,19.51 참조)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로써,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을 통해 쌓이는 경험으로써, 그리고 주교직 계승을 통해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로써 증진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8항). 이러한 친교 안에서 교리서는 개인주의와 불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여정의 도구”입니다. 교리서가 가톨릭 교회 전체의 신앙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는 질문에 귀 기울이고, 시련을 나누며, 인간의 양심 속에 깃든 정의와 진리의 열망을 실천함으로써 사도 활동에 협력합니다.

교리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은 말 그대로 마음속에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르칠 때 우리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도록 생명의 말씀을 마음속에 심어 줍니다. 좋은 교리교사가 되는 방법을 묻는 데오그라티아스 부제에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엇을 설명하든지 당신의 말을 듣는 이가 들으면서 믿고, 믿으면서 희망하고, 희망하면서 사랑하도록 가르치십시오”(『입문자 교리교육』(De catechizandis rudibus), 4,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초대를 우리의 것으로 삼읍시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가 라자로에게 대한 사랑을 가졌다면 가난한 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선을 행했을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모든 고통에서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세속적 재물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에게서 참되고 영원한 선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우리가 탐욕과 무관심에 유혹을 받을 때 오늘날의 많은 라자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찰하게 해 줍니다. 모든 이에게 회개와 용서의 시기이며, 정의에 대한 헌신과 진심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시기인 이 희년에 그들은 우리에게 더욱 효과적인 교리교육이 됩니다.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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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9월 2025, 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