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4세, 새로운 선교적 시대에는 선교 협력과 선교 소명이 요구된다고 강조
레오 14세 교황 성하 세계 선교사와 이주민 희년미사 강론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계 선교사와 이주민 희년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특히 힘들고 상처받은 역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위로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선교적 소명에 대한 인식을 우리 안에 되살리는 아름다운 기회입니다.
저는 특히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고국을 떠나야 했고, 두려움과 외로움의 밤을 지새우며 차별과 폭력을 피부로 경험해야 했던 이주민 형제자매들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우리 각자가 기쁨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 교회는 선교적이며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 나아가 모든 이에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기회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사도 권고 「복음의 기쁨」 23항)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때때로 전쟁과 불의,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의 변방에서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하도록 우리를 보내십니다. 이러한 어두운 장면에 직면하여, 역사상 하느님께 수없이 제기되었던 외침이 다시 떠오릅니다: 주님, 왜 주님은 개입하지 않으십니까? 왜 당신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 고통스런 외침은 성경 전체에 퍼져있는 기도의 한 형태이며, 오늘 아침 우리는 하바꾹 예언자로부터 그것을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하바쿡1, 2 - 3).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그 역사적인 아우슈비츠 방문 동안 모아졌던 위의 질문들에 대하여 어떤 교리교육의 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침묵하시며, [하느님의] 이 침묵은 끊임없이 부르짖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 기도하는 이의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 하느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고, 잊고 계시며,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교리교육, 2011년 9월 14일).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희망을 열어줍니다. 만일 예언자가 우월해 보이는 악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고발한다면,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은 끝이 있을 것이고 종료될 것이라고 그에게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지체없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쿡 2, 4).
그러므로 삶과 구원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어떤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은 믿음에서 유래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지 선으로써 악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도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역시 하느님은 세상에서 활동하고자 하신다는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그렇게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은 양순한 힘인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단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루카 17, 6 참조) 왜냐하면 믿음은 그 자체 안에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의 연민으로 이웃의 고통을 돌보고 헌신할 때 이루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작은 씨앗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몸짓과 말에서 조용하고 겉으로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길을 만들어가는 구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만들 때, 즉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복음과 형제 자매들을 위해 봉사할 때 서서히 성장해 가는 구원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선교 소명의 불꽃을 새롭게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 바오로 6세가 말했듯이, “인류 역사의 이 특별한 시기, 전례 없는 진보와 함께 전례 없는 깊은 당혹과 절망이 뒤따르는 정말 전례 없는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세계 전교 주일 담화, 1971년 6월 25일).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선교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선교란 것을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빈곤한 상황에 처해 있는 먼 땅으로 가는 것, 곧 '떠남'과 연관시켰다면, 오늘날 선교의 국경은 더 이상 지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과 고통, 더 큰 희망에 대한 열망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주민 형제자매들의 이야기, 폭력으로부터의 도피, 그에 수반되는 고통, 실패에 대한 두려움, 해안을 따라 바다를 횡단하는 위험, 고통과 절망의 외침이 이것을 증언해 줍니다: 형제자매들, 정박할 수 있는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기를 희망하는 배들과 상륙할 안전한 육지를 찾으려는 희망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 눈빛들은 무관심의 냉대나 차별의 낙인을 만나지도 말아야 하고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선교는 단지 '떠남'이 아니라 환대와 연민과 연대를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하여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주의라는 안락함에 도피하지 않고 머무르는 것, 멀고 고통스러운 땅에서 온 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머무르는 것, 그들에게 우리의 팔과 마음을 열고, 그들을 형제로 맞이하기 위하여 머무르는 것,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존재가 되기 위해 머무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하여 '머무는 것' 입니다.
많은 남녀 선교사들, 그리고 신자들과 선의의 사람들도 이주민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고 고정 관념과 편견을 넘어 이주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형제애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귀중한 봉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자신들의 작은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인 선교 자세”(복음의 기쁨, 25)를 취하도록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선교적 헌신을 요구합니다: 선교 협력과 선교적 소명
우선 저는 여러분에게 교회들 사이에 새로운 선교 협력을 촉진할 것을 요청합니다. 서구와 같이 오래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공동체에서는 남반구에서 온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존재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상호 교류이며 그리스도교를 보다 더 개방적이고 보다 더 생활하게 하고 보다 더 활력을 지니도록 촉진하는 상호 교류인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땅으로 떠나는 모든 선교사는 자신이 만나는 문화를 신성한 존경심으로 살아가면서 좋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인도하고 복음의 예언을 그곳에 가져 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선교사 성소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특별히 유럽 교회에 다음과 같은 점을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오늘날은 새로운 선교적 열정, 선교지에서 봉사에 헌신하는 평신도, 수도자들, 사제들, 그리고 특별히 젊이들 사이에서 이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소 체험과 새로운 제안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개별 교회의 지역 성직자와, 남녀 선교사들, 그리고 성소를 식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저의 애정 어린 축복을 보내는 바입니다.
저는 이주민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항상 환영합니다! 성경에서 여러분이 건너온 바다와 사막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현존시키셨던 '구원의 장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만나게 될 남녀 선교사님들 속에서 이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엘리사벳에게 봉사하기 위해 서둘러 유대 지역의 산을 걸어가신 당신 아드님의 첫 선교사 성모 마리아의 전구에 여러분 모두를 맡깁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가 사랑과 정의, 평화의 왕국인 그리스도 왕국의 협력자들이 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번역 한영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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