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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Discorso della montagna 2024.11.03 Discorso della montagna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12월 14일

「주님의 산상수훈에 대하여」(De sermone Domini in monte) 제1권 11:

11. 그러므로 저는 이사야 예언자가(11, 2) 말하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 또한 이 행복의 단계 및 선언들과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제시되는 순서에 관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서는 가장 탁월한 은사부터 열거하기 시작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낮은 은사부터 시작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순서대로 단계를 오르면서 그 은총들을 헤아려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경외심, 그다음 효경, 셋째로 지식, 넷째로 굳셈, 그다음은 의견, 그리고 통달(깨달음), 마지막으로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겸손한 이들의 고유한 것으로, 여기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들, 곧 자신을 부풀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은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스스로 부풀리고 교만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만해지지 말고 두려워하십시오”(로마 11, 20). 달리 말하면, “스스로 올려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효경은 온유한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어떤 사람이 효경의 마음으로 진리를 찾을 때 성경을 공경하고,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맞서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은 슬퍼하는(우는) 사람들에게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성서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지배받고 있는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들이고 그것을 선하고 유익한 것으로 잘못 믿으며 그토록 갈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주님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굳셈은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딱 해당합니다.. 이들은 참된 행복을 누리려는 열망 속에서 심각한 수고를 감내하며,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서 끊어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주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견은 자비로운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이는 그토록 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책입니다. 즉, 우리가 용서받기를 바라듯이 용서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부분에서 도움받기를 원하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곳에서 다른 이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주님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통달의 은사는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합당합니다. 이는 깨끗한 눈으로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이사 64, 3; 1코린 2, 9)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 대해 주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에게 해당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안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이성에 반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이 자기 정신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인간의 정신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 대해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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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월 2025,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