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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Vangelo di domenica 2019.02.17 Vangelo di domenica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4월 10일

「주님의 산상수훈에 대하여」(De sermone Domini in monte) 제2권 47-53:

47. 이어서 말씀하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1)라 는 말씀은 바로 이 의도에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이 말씀은 잘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두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어서 곧 밝혀 주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여기서 “마몬”은 히브리인들이 돈을 가리켜 부르는 말입니다. 또한 포에니어에서는 이익을 “맘몬”이라 합니다. 마몬을 섬기는 이는, 그 사악함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을 맡게 된 어떤 존재를 섬기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우두머리”라 부르셨습니다(요한 12,31).

사람은 이를 미워하고, 다른 쪽, 곧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혹은 한쪽을 견디며 하느님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마몬을 섬기는 이는 가혹하고 파멸적인 주인을 견디게 됩니다. 탐욕에 사로잡혀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마귀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를 견뎌내야 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큰 집에서 남의 여종과 정욕으로 결합한 사람이, 그 여종의 주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지배 아래에서 혹독한 종살이를 견디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48.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라고 하시고, “미워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신 까닭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으나, 업신여길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선하심에 안주하여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러한 교만하고 해로운 안일함에서 우리를 불러내시며,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집회 5,6). 또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 2,4)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시고, 들올리브를 참올리브의 풍성함에 참여하게 하시는 그분보다 더 큰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본래의 가지일지라도 믿지 않는다 하여 아낌없이 꺾어버리신 분보다 더한 엄격함이 어디 있겠습니까?(로마 11,17-24)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스르는 일을 피하려는 자는 누구든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믿지 말 것이며, 제 마음의 선한 지향을 모든 이중성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지혜 1,1).


4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5).

이는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필수적인 것들 때문에 마음이 이중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비로 어떤 일을 행할 때조차, 그것을 마련하는 데 우리의 의도가 기울어져, 타인의 유익보다 우리의 이익을 더 바라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필요한 것을 구하려는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음식과 옷보다 훨씬 더 큰 것, 곧 영혼과 육신을 주셨음을 기억하라고 일깨워 주시며,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마음이 이중적으로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이는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서 음식을 훨씬 더 쉽게 주실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함은, 여러분에게 몸을 주신 분께서 옷을 훨씬 더 쉽게 주실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50. 음식이 영혼에 유익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형체가 없는 반면 음식은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이라는 말이 흔히 “이 생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됨을 알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물질적인 음식으로 유지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버려야 할 이 삶에 대하여 이 말씀을 이해하지 않는다면—순교자들이 그러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이 계명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하신 말씀과 상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1.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마태 6,26)

곧, 여러분이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새와 같은 비이성적 피조물 위에 놓인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마태 6,27-28)
곧, 여러분의 몸이 이러한 크기에 이르게 된 것은 여러분의 애씀 때문이 아니라, 그 몸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의 권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섭리는 또한 여러분을 입히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몸이 이러한 크기에 이른 것은 결코 여러분의 걱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애쓴다 하여도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몸을 입히는 일 또한 그분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보듯이, 그러한 몸을 가지게 된 것도 그분의 권능 때문입니다.

52. 음식에 대하여 권고하셨던 것처럼 옷에 대해서도 훈계가 필요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말씀이 이어집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 6,28-30)

이 위로의 말씀들을 '하늘의 새'나 '들의 나리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태여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더 큰 것'을 확신하게 하려는 말씀이니, 마치 하느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던 재판관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준 것과 같습니다. 그가 재판을 해준 것은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선하신 하느님을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인간조차 끈질기게 매달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함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간구하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돌보시는지를 우리가 깨닫게 하려 하셨습니다.

53.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1-3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선행의 목적이 되는 '선'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갈망해서는 안 됨을 지극히 명료하게 선언하십니다. 다만 그것들은 필요한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선'과 우리가 사용하여야 할 '필요한 물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위의 권고가 이를 밝혀줍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질서 지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 생에서 그 나라에 이르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이 삶은 그러한 필요한 것들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먼저”라고 하신 것은, 다른 것들은 “나중”에 구하여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가치의 질서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선이며,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필요한 수단들입니다. 우리는 그 선에 이르기 위하여 이러한 필요한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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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4월 2026, 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