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5월 23일
71. 그러므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이를 듣는 이는 자신의 무지와 약함을 깨닫고 나서게 될 것입니다. 아직 받지도 못한 것을 주지 말라는 그 명령이 자신에게 내려졌음을 느끼며, 그는 다음과 같이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개들에게 주지 말아야 할 그 거룩한 것은 무엇이며,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아야 할 진주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주님께서는 아주 적절하게 다음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8)구 하는 것은 우리가 명령받은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마음의 올바른 준비와 굳셈을 얻기 위한 것이며, 찾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복된 삶은 행동과 묵상으로 이루어지는데, 행동은 힘을 필요로 하고 묵상은 실재가 우리에게 드러나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중에서 첫째는 청해야 할 것이고, 둘째는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첫째는 주어질 것이요, 둘째는 찾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세의 삶에서 지식은 소유보다는 길에 대한 지식이 우선입니다. 사람이 참된 길을 찾았을 때 비로소 소유에 이르게 되는데, 문을 두드려야만 그 소유가 우리에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72. 이 세 가지, 곧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발이 병들어 걸을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먼저 치유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야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하십시오”라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걸을 수 있게 되거나 심지어 달릴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잘못된 길로 가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번째로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 길을 찾아 목적지에 도달하더라도, 문이 닫혀 있다면 걷는 능력도, 도달한 사실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열어 주는 이가 없다면 말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가 “두드려라”라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73.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셨으며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하는 것을 받고, 찾는 것을 얻으며, 두드릴 때 문이 열리도록 반드시 끈기 있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꽃을 언급하시며 먹고 입는 것으로 절망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작은 일에서 큰 일로 희망을 높이시며 여기서도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악한 이들이 어떻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과 죄인들을 악하다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주는 좋은 것들은 그들의 판단에 따라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들이 실제로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며 이 병든 현세의 삶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는 이가 악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3,1)이며, "그분은 하늘과 땅을,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시편 145,6)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선을 주실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청할 때, 그분은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고 다른 것을 주지도 않으실 것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 역시 악할지라도 청하는 것을 줄 줄 압니다. 우리는 자녀를 속이지 않으며, 그들에게 주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74. 지혜의 길에서 견고함과 올바른 걸음을 유지하는 것은 선한 덕행에 달려 있으며, 이는 마음의 순수함과 단순함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길게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결론지으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라틴어 번역자들이 “선한(bona)”이라는 말을 덧붙여 의미를 더 분명히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근거로 이 말씀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절제 없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어서, 자신이 자극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그렇게 행한다면, 그가 이 구절을 바르게 실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자가 그렇게 오해할 것을 우려하여, 문장을 더 명확히 하고자 "선한"이라는 형용사가 덧붙여졌으리라 봅니다. 그리스어 사본에 이 단어가 없다면 그것 또한 수정되어야 마땅하겠으나, 누가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단어가 빠져 있다 하더라도, 이 문장을 완전하고 온전한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라고 할 때, 이 말은 일반적이거나 대충 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의 엄밀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선한 일에만 "의지(voluntas)"가 있는 것이며, 나쁘고 악한 일에는 엄밀히 말해 의지가 아니라 정욕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엄밀한 용어만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필요할 때에는 다른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매우 엄격하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75. 이 계명은 이웃 사랑에만 해당하고 하느님 사랑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담긴 두 계명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2,40). 만일 주님께서 "너희에게 행해지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행하여라"고만 하셨다면, 이 한 문장으로 두 계명을 모두 포괄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 행하라는 명령은 곧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사람들"에 대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뒤이어 추가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두 계명을 언급하실 때는 단순히 "정신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시며 "온(모든)"이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마태 22,40).
여기서는 "온(모든)"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 사랑에 관한 다른 계명의 자리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계명이 마음의 단순함으로 지켜지기를 원하며, 의도를 숨길 수 있는 상대인 "사람들"에 대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대목이기에 이처럼 표현하신 것입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줄 때, 어떤 현세적 이익도 바라지 않고 앞서 "순수한 눈"에 대해 다루었을 때의 그 지향을 갖지 않는 한, 결코 단순한 마음으로 줄 수 없습니다.
76. 눈이 정화되고 단순해지면, 자신의 내적인 빛을 보고 관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눈입니다. 이러한 눈을 가진 이는 자신의 선행이 참으로 선한 것이 되도록 그 목적을 사람들의 칭찬에 두지 않습니다. 비록 칭찬을 받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자랑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현세의 삶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이웃에게 선을 베풀지 않습니다. 또한 그 의도와 의지를 볼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이웃에게 베푸는 모든 봉사는, 타인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의도대로, 즉 물질적 이익을 기대함 없이 행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77.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제 지혜를 찾고 소유하는 의무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생명의 나무”를 찾고 소유하기 위해, 눈은 이미 제시된 모든 것을 통해 훈련되어 좁은 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은 주님의 멍에가 거칠고 짐이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적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고 외치시는 분을 신뢰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며 시작되었습니다. 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많은 이가 거부하고 소수만이 받아들이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아지고 그 문은 더욱 비좁아지는 것입니다.
78. 그러므로 지혜와 진리의 지식을 약속하면서도 실제로는 갖지 못한 이들, 곧 이단자들을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좁은 문과 험한 길을 택하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이 단지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시려고 곧장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마태 7,15)
그러나 그들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아볼 줄 아는 단순한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어 비유로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마태 7,16-19)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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