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5월 29일
79.이 구절에서 우리는 특히 두 나무의 비유를 근거로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를 경계해야 합니다. 즉,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본성이요,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것도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도 아니라고 강변하는 자들의 오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저서들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며,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더 논의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명히 해둘 점은, 이 두 나무의 비유가 결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 비유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여, 이 구절의 앞뒤 문맥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영적 눈멀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다음 말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악한 영혼은 회개하여 선하게 될 수 없고, 선한 영혼은 악하게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좋은 나무는 나쁜 나무가 될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곧 영혼 자체, 곧 사람 자신을 뜻하며, 열매는 사람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은 선한 행실을 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은 악한 행실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 뜻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마태 12,33)
만일 이 두 나무가 두 본성을 의미한다면, 주님께서 “되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본성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같은 대목에서 주님께서는 이 두 나무를 다시 언급하시며 이어 말씀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마태 12,34)
그러므로 사람이 악한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면, 그는 이미 악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은 뜨거울 수 없다.”는 말도 참으로 옳습니다. 눈이 녹아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눈이라고 부르지 않고 물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 눈이었던 것이 더 이상 눈이 아닐 수는 있지만, 눈인 채로 뜨거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이 더 이상 악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악한 사람이 선한 행실을 할 수는 없습니다. 혹 악한 사람이 때때로 어떤 “유익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그를 도구로 사용하여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는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
그들이 전하는 말은 선한 것이었으며 이를 듣는 것은 유익했으나, 그 선함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마태 2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선포하였고, 듣는 이들에게는 유익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예언자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밀씨를 뿌리고도 가시를 거두어들이며 지칠 때까지 일을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예레 12,13). 이는 그들이 선한 것을 가르치면서도 악한 행실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고 실천한 이들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통하여'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거둔 것입니다. 마치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울타리에 엉켜 있는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것과 같습니다. 그 포도는 포도나무의 열매이지 가시나무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80. 우리는 나무를 식별하기 위해 어떤 열매를 보아야 하는지 정당하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복음에서 언급된 '열매'가 단식이나 기도, 자선과 같은 외적 행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에게 속고는 합니다. 만약 위선자들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다면,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주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비심이 아니라 허영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바라기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거나 기도하는 체하며, 또 많은 이들이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단식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이러한 기만으로 사람들을 올가미에 가두며, 양의 옷 아래 숨은 이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해치고 약탈하기 위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경고하신 '나무를 식별하는 열매'는 이러한 외적 행위들이 아닙니다. 진리의 빛 안에서 선한 마음으로 행해질 때 그것은 양의 옷이 되지만, 기만하기 위해 악한 마음으로 행해질 때는 이리의 위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리들이 종종 가죽을 빌려 쓴다고 해서, 양들이 자기 가죽을 미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81. 그러면 어떤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9-21)
또한 좋은 나무를 알아보게 하는 열매에 대해서도 같은 사도가 이어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매우 적절하게 배치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악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쁨'을 누린다고 할 수 없으며, 단지 기뻐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앞서 '의지'에 관해 논하며, 악인들에게는 진정한 의지가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처럼 “기쁨”이라는 말은 본래 선한 이들에게만 올바르게 사용됩니다. 예언자도 이를 증언합니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57,21)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말도 아무 믿음이나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 언급된 다른 덕목들도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에게서 겉으로는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맑고 단순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속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눈을 깨끗이 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 피해야 할 것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82.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맑은 눈, 곧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실과 말로 드러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유혹(시련)'을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유혹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세속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기대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지혜―“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를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이단자들과 세속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들을 속이는 일에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어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는 우리가 단지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었다고 착각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참된 열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데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친히 모범이 되기를 기꺼이 원하셨습니다.
83. 그러나 누군가는 이 말씀과 사도의 다음 말씀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실제로성령을 모신 이들이 끝까지 견딘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리 없으며, 반대로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성령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도는 “성령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가 여기서 “말한다”는 표현을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말하는 이의 의지와 이해를 포함하여 말한 것입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말한다”는 표현을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표현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포함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참으로 “말한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자기 의지와 생각을 목소리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앞에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기쁨”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본래적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같은 사도는 다른 곳에서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1코린 13,6)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불의를 참으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 혼탁한 욕망에서 비롯된 감정의 흥분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단지 입술로만 말하면서, 자기 지성으로 이해하지도 않고 의지로 실천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자기 의지와 이해가 자신이 말하는 바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만이 참되고 올바른 의미에서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는 “성령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84. 우리가 말한 바와 관련하여 특별히 유의하여야 할 점은, 진리를 관상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은 지니고 있으나 행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속아서는 안 되며, 또한 주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행하신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일들 때문에 속아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곳에 곧 보이지 않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의로움을 실천한 사람들만을 알아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마귀들까지 자기들에게 복종한다고 기뻐하였을 때에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의인들과 성인들만이 다스리게 될 그 도성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또한 말합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9)
8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악한 이들이 그런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행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주님의 종 모세에 맞서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얼마나 많은 기적 같은 일을 행하였는지 읽어 보기 바랍니다. 혹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친히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태 24,23-25)
86. 그러므로 악하고 타락한 자들의 수많은 오류와 기만 속에서 지혜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맑고 단순한 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평화와 변치 않는 견고한 지혜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논쟁하고 다투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까 크게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곧 논쟁하는 자들의 소란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들의 소란은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4-25)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87. 이 모든 말씀의 마지막 결론에는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사람은 자기가 듣고 깨달은 것을 실행할 때에만 그것을 참으로 굳게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여러 증언이 말하듯이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이시라면,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들은 말씀을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7,25)
이러한 사람은 어두운 미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비’는 온갖 유혹이나 악, 또는 영혼을 흔드는 여러 시련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소란은 바람에 비유될 수 있고, 세속의 욕망 가운데 흐르는 이 삶의 급류는 강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순조롭게 다가올 때에는 그것들에 이끌려 다니다가, 거슬러 다가오면 무너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 곧 주님의 계명을 듣기만 할 뿐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게도 이 세 가지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는 견고한 기초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고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기 파멸을 스스로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8-29)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시편의 예언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미 가리켜 보여 준 바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시편 12[11],7)
이 “일곱”이라는 수와 관련하여, 나는 이 계명들을 주님께서 산상 설교의 시작에서 행복 선언으로 말씀하신 일곱 가지 말씀,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가 언급한 성령의 일곱 가지 활동(이사 11,2-3)에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열을 받아들이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곧 주님에게서 들은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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