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38년 만에 되풀이 된 르페브르의 분열
Andrea Tornielli
이는 굴곡진 역사이다. 관대한 시도와 끊임없이 열려 있던 문, 그리고 거듭 주어진 기회들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깊은 고통의 역사이기도 하다. 두 차례의 중대한 분열은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 대주교가 창립한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를 교황과 로마 교회와의 친교에서 갈라서게 만들었으며, 교황의 위임 없이 주교를 서품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7월 1일 일어난 분열은 르페브르파 주교들과 사제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도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신앙교리부의 설명서(Nota esplicativa)에 명시된 바와 같이,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 사제들이 "성사들을 불법으로 집전하고 있으며, 그들이 집전하는 고해성사와 그들이 주례하는 혼인성사는 무효"이기 때문이다.
르페브르의 결정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일부 개혁에 반대하는 소수파에 속해 있었지만, 전례 헌장과 종교 자유 선언에 모두 서명하였다. 그러나 1970년 에콘(Écône)에 성 피오 10세 사제 형제회를 설립한 후, 르페브르는 새 미사 경본에 따른 미사 거행을 거부했으며, 1974년에는 공의회의 개혁을 "교회를 파괴하는 새로운 것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른바 ‘신(新)근대주의적(neo-modernista) 로마’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서면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교구는 사제 형제회에 대한 교회법상 인가를 철회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신학교 폐쇄를 요청하며 대화를 시도하였다. 르페브르가 이를 거듭 거부하자 그는 성무집행정지(a divinis) 처분을 받았으나, 공개적으로 계속 미사를 집전하였다. 1976년 카스텔 간돌포에서 이루어진 교황과의 면담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철학자 장 기통(Jean Guitton)에게 이를 자신의 교황 재임 중 "첫 번째 참된 십자가"라고 부르며 고통을 토로했으나, 친교의 단절이 공식적인 파문으로 이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르페브르가 서명한 교리적 합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출되자 르페브르는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80년에는 새 교황의 정당성에 아무런 의문이 없다고 밝혔다. 1988년 4월,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대주교와 사흘간 이어진 협상 끝에 5월 5일 공동 교리 의정서에 서명했다.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는 교회와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공의회 교도권을 수용하며, 성 바오로 6세 교황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예식을 따른 미사의 유효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또한 사제 형제회 소속 주교 한 명을 축성하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보였다.
첫 번째 이교 행위
그러나 1988년 5월 6일, 르페브르는 합의를 번복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가 사제회 내부 인사를 주교 후보로 선택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며, 교황의 위임 없이 새로운 주교들을 축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다시 만나 협상을 시도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성을 포기해 달라는 전보까지 보냈지만, 1988년 6월 30일 르페브르는 브라질의 안토니우 드 카스트루 마예르 주교와 함께 베르나르 펠레, 알폰소 데 갈라레타, 리처드 윌리엄슨,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레레 등 네 명의 새 주교를 축성하였다. 그 다음 날인 7월 1일, 이 분열 행위에 대해 자동파문제재(latae sententiae)에 처해졌다. 이후 수년 동안 교황청은 교회법적 해결책을 제시할 의향을 보였지만, 르페브르파는 계속해서 "교리적 명확성의 부족"을 이유로 들며, 사실상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부 내용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2000년 희년 순례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조치
2000년 8월, 르페브르파 신자들은 로마로 대희년 순례를 떠났고, 펠레이 주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재위 아래에 이르러 접촉은 더욱 활발해졌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7년 자의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통해 공의회 전 미사 경본의 사용을 자유화했으며, 2009년 1월 24일에는 르페브르가 서품한 네 주교에 대한 파문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복권된 주교 중 한 명인 리처드 윌리엄슨이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과거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그 결정은 퇴색되었다. 이는 르페브르파가 교회와의 온전한 친교를 향해 노력하기를 바랐던 교황을 향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11년 시도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한 부여
2011년 9월, 교리 대화를 마무리할 무렵 성좌는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에 제2차 공의회에 관한 신학적 토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교황 교도권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간략한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였다. 펠레이 주교는 이 문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교회법적 해결책이 논의되었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르페브르파가 법적 승인 자체를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자비의 희년을 맞아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합법적으로 집전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부여하였고, 이후 이를 영구적으로 연장하였다. 이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 배려와 개방의 표시였다.
새로운 이교, 무효인 고해성사와 혼인성사
2026년 2월 2일,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는 7월 1일 새로운 주교들을 축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월 12일, 사제 형제회 총장 다비데 팔리아라니 (Davide Pagliarani) 신부는 로마에서 신앙교리부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Víctor Manuel Fernández) 추기경을 만났다. 장관은 르페브르파에 대해 "아직 충분히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주제들에 관하여, 분명한 방법론에 따른 특별한 신학적 대화의 여정"을 제안하였다. 그 목적은 "가톨릭 교회와의 온전한 친교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들"을 확인하고 교회법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그는 또한 "이러한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제 형제회가 이미 발표한 주교 축성 결정을 보류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화를 향한 호소와 초대에도 불구하고 르페브르파는 주교 축성을 강행하며 새로운 이교를 선언하는 결과를 낳았다. 6월 16일 카스텔 간돌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레오 14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교회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거부한다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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