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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전쟁과 폭력의 근원이지만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월 31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악덕과 미덕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가며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악덕인 “분노”를 설명했다. 교황은 분노와 관련해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파급력을 발휘한다며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용서의 기술”을 활용해 신속하게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교리 교육: 악덕과 미덕 6. 분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최근 몇 주 동안 우리는 악덕과 미덕에 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이어왔습니다. 오늘은 잠시 멈춰 ‘분노’라는 악덕을 살펴보겠습니다. 분노는 특히 암울한 악덕이며, 아마도 육체적인 관점에서 가장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악덕일 것입니다. 분노에 지배당한 사람은 이러한 충동을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몸의 움직임, 공격성, 거친 호흡, 냉혹하고 찡그린 표정에서 분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급격하게 표출되는 분노는 멈춤을 모르는 악덕입니다. 불의를 당했거나 불의를 당했다고 생각되는 경우, 분노는 종종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 아닌 불의를 당한 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에서는 분노를 삭이며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남성들이 있습니다. 분노는 넓게 퍼진 악덕입니다. 분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하고, 화가 나는 이유와 생각을 차단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기도 합니다. 

분노는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악덕입니다. 분노는 특히 상대방의 삶의 선택이 나의 선택과 다를 때, 상대방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서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버립니다. 분노와 원망을 불러 일으키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죠. 상대방의 목소리 톤, 상대방의 사소한 일상적인 몸짓, 상대방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인간관계가 이러한 수준으로 악화되면 이성을 잃게 됩니다. 분노는 이성을 잃게 만듭니다. 분노의 특징 중 하나가 때때로 시간이 지나도 감정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거리를 두고 침묵하는 것조차 오해의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조금 전 들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즉시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를 시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 해가 지기 전에 모든 감정을 즉시 푸는 게 중요합니다. 낮 동안 오해가 생겨서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갑자기 서로 멀게 느껴지더라도 악마에게 밤을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악덕은 우리로 하여금 밤을 지새우게 할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내 잘못이 아니라 비록 설명할 수 없더라도 상대방의 잘못을 되새김질하며 우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노에 지배당한 사람은 항상 문제가 상대방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결함과 자신의 잘못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지뢰밭과도 같은 인간관계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인간관계 말입니다. 우리가 항상 모든 이를 합당하게 사랑한 적이 없듯이, 인생에서 우리는 우리를 합당하게 대하지 않는 이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우리 모두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용서받기 위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용서의 기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함께 머물지 못합니다. 분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온정과 넓은 마음, 온유와 인내입니다. 

분노에 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분노가 끔찍한 악덕이며, 전쟁과 폭력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서사시인 『일리아스』의 서문에 “끝없는 슬픔”의 원인이 될 “아킬레우스의 진노”가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분노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우리 안에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는 분노의 일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여움은 어느 정도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삶의 경험이죠. 우리는 분노가 이는 것에 책임이 없지만 분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항상 책임이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를 올바른 방식으로 발산하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불의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약자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분노가 아니라 내면의 움직임, 곧 거룩한 격분인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생 동안 여러 차례 경험하셨습니다(마르 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으로 이러한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분노가 아니라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에 따른 강력하고 예언자적 행동을 취하셨습니다(마태 21,12-13 참조). 우리는 두 가지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인 열정과 악한 분노는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노여움의 올바른 척도를 찾고, 노여움을 잘 다스려 악이 아닌 선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번역 김호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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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월 202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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